나의여행기

청령포

초록별님의 2008. 5. 3. 17:12

 

청령포

강원도 기념물 제5호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이 곳은 조선왕조의  제6대 임금인 단종이 1457 년 (세조 1) 에 노산군 (魯山君) 으로 낮추어져 처음으로

유배(流配)되었던 곳이다.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은 험준한 절벽으로 막혀 있어서,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업는 유배지로 적합한 곳이다. 단종은 1457 년 6월부터 두달 동안 이

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그 해 여름에 홍수로 청령포가 범람하여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관풍현(觀風軒)

으로 옮겨서 생활을  하였다.

1726 년 (영조2) 에는 단종의 유배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금표비(禁標碑)를

세웠고, 1763 년 (영조39) 9 월에는 영조가 친필로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時遺地碑)'라는

비문을 써서 단종이 살던 집터에  비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 2000년 4월 에는 단종이 거처하던  곳에

정면 5 칸, 측면 2칸 반 규모의 겹처마에 팔작지붕 형식으로 기와집을 복원하였고 , 부속 건물로 정면 5칸,

측면1칸 반의 규모로 홑처마에 우진각 지붕 형식의 초가집을 건립하였다.

 

 

 

 

 

 

 

 

 단묘재본부시유지비 (端廟在本府時遺地碑)

이 곳은 1457 년 6월 22 일 조선 (朝鮮) 제 6 대 임금 인 단종대왕 (端宗大王) 께서 왕위를 찬탈 당하고

노산군 (魯山君) 으로 강봉 (降封). 유배(流配) 되어 계셨던 곳으로 , 당시 이곳에 단종대왕 거처(居處) 인 어소(御所)가

있었으나 소설(消失) 되고 영조39 년(1763년) 에 이 비(碑) 를 세워 어소위치(御所位置)를 전하고 있다.

비의 총 높이는 162cm 로서 1 단의 화강석 기단(基壇)위에  오석으로된 비신(碑身) 을 세우고 비전면 (碑前面) 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地) 라고 음각 되었으며 후면에는  세황명숭정 무진기원후삼계미계추 체경서

영원영 수석 지명 청령포(歲皇明崇禎 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 涕敬書令原營竪石  淸怜捕) 로 음각 되어 전면,측면

각 1 칸씩의 비각 (碑閣) 안에 보존 (保存) 되어 있다.

 

 

 

 

금표비  (禁標碑)


금표비(禁標碑)는 단종 (端宗) 께서 1457 년 노산군 (魯山君) 으로 강봉, 유배되어 계시던 이곳을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행동을 제한하기 위하여 영조(英祖) 2년 (1726 년) 에 세운 비석(碑石)으로

동.서 삼백척,남.북 사백구십척(東.西 三百尺 南.北 四百九十尺) 이라 새겨져 있다. 당시 단종에게도

이와같은 제약(制約) 이 있었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영월의 관음송 (寧越 觀音松)

이소나무는 높이 30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가 5m 이며, 지상(地上) 1.2 m 높이에서 두가지로

갈라졌고, 갈라진 두 가지의 밑둘레는 각각 3.3 m 와 2.95 m 이다.

나무의 나이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朝鮮) 단종 (端宗) (1441~1457) 이 유배생활(流配生活) 을 할때

이 나무의 갈라진 가지 사이에 앉아서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어서 약600년 정도로 추청하고 있다.

이 소나무를 관음송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나무가 당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관(觀) 들어 음(音)나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두견새 우는 청령포

작사.이만진
작곡.한복남
노래.심수봉

1.왕관을 벗어놓고 영월땅이 웬말이냐
   두견새 벗을 삼아 슬픈노래 부르며
   한양천리 바라보고 원한으로 삼년세월
   아.애달픈 어린임금 장릉에 잠들었네.

2.두견새 구슬프게 지저귀는 청령포야
   치솟은 기암절벽 구비치는 물결은
   말해다오 그 옛날의 단종대왕 귀양살이
   아.오백년 그역사에 비각만 남아있내

3.동강물 맑은 곳에 비춰주는 달을보고
   님 가신 뒤를 따라 꽃과 같이 사라진
   아름다운 궁녀들의 그 절개가 장하고나
   아.낙화암 절벽에는 진달래 피고 지네.